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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용사 - 김관섭 “마양도 핵잠수함 공장 정보 제공, 국가 안보에 기여했다”

“마양도 핵잠수함 공장 정보 제공, 국가 안보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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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창 기자
기사입력 2020-02-19

“마양도 핵잠수함 공장 정보 제공, 국가 안보에 기여했다”

 

  귀순용사 김관섭(85) 선생은 대한민국에 살면서 고마움과 서운함을 동시에 안고 있는 특이한 인물이다. 지난 1974년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면서 북한의 엄청난 정보를 주었지만 3년 6개월 동안 간첩으로 내몰려 고문과 학대를 받은 것은 서운함의 시작이었다.

적은 금액이지만 정착금을 주고 직업을 알선해 준 대한민국 덕분에 굶지 않고 배부르게 살아온 45년의 인생은 고마움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법과 원칙을 배웠고 자신이 억울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안 이상 아직까지도 수급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자신이 서운하고 억울해 이제부터라도 자존심을 가지고 살고 싶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통일안보교육을 하면서 교통사고를 당해 지체장애인이 됐지만 시내 곳곳을 거닐며 건강을 챙기고 있는 김관섭 선생을 17일 오전 신문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 김관섭 귀순용사는 올해 나이가 85세다. 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100세 시대 인생을 살고 있다. 지난 1974년 대한민국으로 귀순할 때만 해도 40세의 젊은 나이였다. 어느덧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인생도 45년이 지난 것이다. 귀순했지만 간첩으로 몰려 고생도 많았던 인생이지만 이제는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귀순할 때 제공한 엄청난 정보들을 제대로 인정받아 국가유공자로 떳떳한 삶을 살고 싶다고 소원을 말하고 있다. 김관섭 귀순용사는 현재 수급자로 살아가고 있다.
                                                                        © 이태호 기자 kazxc4151@naver.com

 

Q.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면서 즐거움과 괴로움, 기쁨과 슬픔이 함께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A. “그동안 대한민국이 ‘귀순용사 특별원호법’에 의해 정착금과 주택을 주어 정착에 도움을 준 국민들의 은혜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30년 동안 국민안보교육을 진행하여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봉사하는 정신으로 보람을 느끼면서 40여년을 살아왔지만 간첩조작사건으로 고문 받은 후유증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서 살아온  힘든 나날도 있었지만 내가 선택한 자유의 소중함을 잘 알고 변함없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Q. 그럼 언제 어떤 경로로 우리나라에 귀순한 것인가요.

 

A. “지난 1974년 8월 26일 개성지구 개풍군 해평리에서 북한군 중대장(대위)으로 근무하다가 야밤에 해창포를 출발해 한강하류를 약 7시간 동안 헤엄 쳐 강화군 양사면 교산2리 해안지역으로 귀순했습니다.

귀순해서 마양도 핵잠수함 공장 정보를 비롯한 북한의 고급 군사정보 129건을 제공하는 등 대한민국의 국가안보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제가 35년생이니까 월남할 때 나이가 40세였습니다.

벌써 제 나이 85세이니까 45년 전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Q. 처음 귀순해서는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처음 귀순해서는 중앙정보부 간첩조작 사건으로 인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귀순당시 지역을 자세히 모르니까 육지로 올라와서 처음으로 본 강화군 양사면 교산2리 농민 박은복(60)씨에게 지서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그 분이 나를 간첩으로 신고한 것입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분은 간첩으로 신고하면 간첩포상금이 주어져서 좋고 정부당국도 간첩을 잡아서 좋은 것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 일로 인해 3년6개월 동안 감금 수용되어 고문 받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귀순용사가 간첩이 되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간첩이 아니라 귀순용사였음이 밝혀진 197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통일안보교육을 다니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6년까지 30년 동안 실시한 통일안보교육이 모두 4,123회에 연인원 131만 9천명이었습니다. ”

 

Q. 그렇다면 대한민국에 대해 서운한 부분도 있었겠군요.

 

A. “당연히 있었지요. 북한이 싫어 남한으로 목숨 걸고 귀순한 제가 간첩이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당한 고문 후유증은 아직까지도 남아 밤잠을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저는 74년 8월 26일 귀순했는데 같은 해 9월 5일 귀순해 북한 3땅굴 정보를 제공한 김부성 씨는 평가받고 보상을 받았는데 귀순당시 신포시 핵잠수함공장 정보 등 129건의 북한군 고급군사정보를 제공한 공적을 40년이 지났다고 인정을 안 해주어 대한민국에서 버림받은 귀순용사가 되었습니다.”  

 

▲ 지난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김관섭(사진 왼쪽) 귀순용사는 그 해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 <사진제공=귀순용사 김관섭>

 

Q. 하지만 즐거움과 고마움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A. “그렇지요. 대한민국에 와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전국을 다니면서 통일안보강의를 하여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1992년 국민훈장 석류장(대통령 노태우), 1996년 경인봉사대상(경인일보사), 1998년 경기도문화상 교육부문(경기도지사 임창열), 1999년 대통령표창(대통령 김대중), 2005년 국민훈장 목련장(대통령 노무현), 2011년 국가기록원장 감사장(귀순시 휴대한 권총 기증한 공로) 등이 그것입니다. 또 귀순한 보람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지난날들도 제게는 더없는 고마움이었습니다.”

 

Q. 30년 안보강연 및 해군낙도홍보단 활동, 산사태시 와동 주민 생명을 구조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한 것으로 아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말씀해주시지요.

 

A.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1977년부터 2006년까지 전국을 누비며 통일안보강사로 활동했습니다.

1982년부터 87년까지 5년 동안 해군낙도홍보단에 자진 참여해 섬 주민과 학생 안보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했습니다. 그때 주민들의 불편사항을 파악해 섬 마을 전기발전기 수리 및 부품을 교환토록 하고 선착장 건설자금 확보에 앞장서 선착장을 건설하게 하는 등 섬 주민 소득증대와 사고예방에도 힘썼습니다.

특히 1990년 7월24일 단원구 와동 산34-2번지(현 와동행정복지센터 뒷산)가 집중호우로 산사태 위험에 처한 6가구 부녀자와 어린이 20여명을 제 집과 인근 안전지대로 긴급 대피시켜 인명과 재산을 구조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한 바 있습니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는 대북 심리전 방송을 148회 진행하여 13명의 탈북귀순을 유도하는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Q.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 온지도 45년이 넘었습니다. 마지막 여생을 보내면서 국가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A. “처음 귀순했을 때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통일안보 강연을 다니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지체장애인이 되면서 까지 국가안보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제는 늦게나마 정부가 제가 기여한 공적을 인정하고 ‘귀순용사 특별보상법’에 의해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부는 국방부로 떠넘기고 국방부는 통일부로 떠넘기는 서로 떠넘기기식 답변은 지양해주시고 확실한 평가를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국방부는 제가 1974년 귀순하면서 진술했던 각종 첩보내용이 모두 폐기돼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국가 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함경남도 신포시 마양도 핵잠수함공장 고급군사 정보 진술첩보 자료가 공공기록물법(시행 2000년) 제정전의 내용으로 폐기돼 공적심사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74년 이념대결시대에 주적이 인민군이었는데 적 자료를 폐기했다고 하고 북파공작원이 피를 흘려도 못 얻을 북한 고급 군사정보를 폐기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가고 이해할 수 없고 1999년 5월 20일 국군 9965부대장이 발급한 김관섭 공적확인서를 인정 평가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Q. 특별하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해 주시지요.

 

A. “저는 1974년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면서 마양도 핵잠수함 공장 정보를 국가에 제공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그 정보가 국가안보에 중요한 정보인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 5월 11일 한 언론사의 사설을 보고 제가 제공한 마양도 해군기지 첩보가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월남귀순용사 특별보상법(78.12.6) 7조 ‘북한정보와 장비를 휴대한자는 상훈법에 의해 훈장을 수여한다’라는 법을 적용하여 평가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문서가 폐기되어 당시 기록이 없어 공적심사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참으로 억울합니다.

이것을 바로잡아 주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지금 생활보호대상자로 살고 있으며 때로는 귀순한 것을 후회할 때도 있습니다.”

 

Q. 끝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지요.

 

A. “저는 남파간첩도 아니고 대한민국 법을 위반한 사람도 아닌 아무 죄 없는 귀순자입니다.

그런 저를 간첩으로 만들려고 고문하고 3년 6개월 동안 법 없이 감금수용시킨 반 인륜적이고 천인공로할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이제는 진실이 밝혀져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서글프게 살아가는 인간이 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청춘시절 김일성에게 충성하고 배신당하고 대한민국에 충성하고도 버림받고 보니 충성할 수 있는 조국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제가 국가안보에 기여한 공적을 평가 인정해 줘 남은여생을 목숨 걸고 찾은 자유가 헛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대담=김태창 편집국장 chang4900@naver.com

 


-귀순용사 김관섭은 누구인가

 1935년 9월 평안북도 정주군 고덕면에서 태어났다. 1954년 평양 재정경제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에 복무하다 1963년 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1974년 북한군 중대장(대위)으로 근무하다가 같은 해 8월 26일 한강하류를 7시간 동안 헤엄쳐 귀순했다. 30년간 통일안보 강사, 한국자유총연맹 교수, 국정홍보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가안보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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